아리엘아! 아리엘아! (3) 미션21 phj2930@nate.com |
2022년 08월 26일(금) 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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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서
그 결과, 고위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호소를 물리치고 그들은 “로마와 가이사”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랍비들과 고위 제사장들과 저명한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보복이 두려워서 대중적인 회합을 갖고 반란의 어리석음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도 허사였다. 따라서 그들은 플로러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대표자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아그립바는 호응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 다음, 예루살렘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반군파가 승리를 거두고, 그 후 성전 근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한 로마 수비대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일이 이렇게 확전되자 로마 당국은 3개월도 가지 않아 시리아주재 로마 총독 세시우스 갈루스로 하여금 로마 군대 제12군단을 소집 상당수의 보조 군대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도록 파송하였다. 로마군대는 초막절 기간에 예루살렘 성벽 앞에 이르렀으며, 곧장 경계가 삼엄한 성전 벽에까지 침투하였다. 분명히 승리가 임박하였는데, 갈루스는 갑자기 그리고 겉보기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후퇴를 명하였다. 유대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였다. 그들이 공격하자 퇴각하던 로마 군인들은 많은 짐과 포위 장비들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해주셨다고 확신하고 “예루살렘 성도(聖都)”와 같은 글을 새긴 주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대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기억하였다(눅21:20-21). 고대의 여러 문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그와 같은 예언적 명령을 따라 그때 예루살렘과 유다 땅을 떠났음을 알려 주고 있다. 기원후 제3,4세기 교회 역사가 유세비어스(Eusebius of Caesarea)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전체 교회는 전쟁 전에 경건한 자들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적 명령을 받고 그 도시를 나와 요단강을 건너 ‘펠라’라는 도시에 거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대의 에피파니어스(Epiphanius of Salamis)는 ‘예루살렘’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포위에 대해 그리스도로부터 예고를 받고 ‘펠라’로 이주하였다”고 기록했다.
한편 네로(Nero) 황제(A.D 37.12.15-68.6.9)는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하도록 베스파샨 장군을 임명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위험 지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베스파샨은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의 강력한 보조를 받으면서,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였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여 갈릴리 지방의 도시들을 공격하였으며,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마침내 도시들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을 실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타리캐’와 ‘가말라’ 두 도시가 당한 참상은 그 지방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잘 보여준다.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타리캐’에서는 유대인 6천 명 이상이 전투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자비한 취급을 받았다. 늙고 쓸모없는 사람들 1천 2백 명은 살해되었다. 3만여 명은 노예로 팔려갔으며, 튼튼한 청년 6천 명은 네로 황제를 위하여 고린도 운하를 파는 데 노역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가말라’에서 유대인들의 사태가 절망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성벽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들도 몸을 던져 죽었다.
▶다음호에 계속
그 결과, 고위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호소를 물리치고 그들은 “로마와 가이사”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랍비들과 고위 제사장들과 저명한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보복이 두려워서 대중적인 회합을 갖고 반란의 어리석음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도 허사였다. 따라서 그들은 플로러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에게 대표자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아그립바는 호응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 다음, 예루살렘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반군파가 승리를 거두고, 그 후 성전 근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한 로마 수비대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일이 이렇게 확전되자 로마 당국은 3개월도 가지 않아 시리아주재 로마 총독 세시우스 갈루스로 하여금 로마 군대 제12군단을 소집 상당수의 보조 군대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도록 파송하였다. 로마군대는 초막절 기간에 예루살렘 성벽 앞에 이르렀으며, 곧장 경계가 삼엄한 성전 벽에까지 침투하였다. 분명히 승리가 임박하였는데, 갈루스는 갑자기 그리고 겉보기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후퇴를 명하였다. 유대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였다. 그들이 공격하자 퇴각하던 로마 군인들은 많은 짐과 포위 장비들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해주셨다고 확신하고 “예루살렘 성도(聖都)”와 같은 글을 새긴 주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대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기억하였다(눅21:20-21). 고대의 여러 문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그와 같은 예언적 명령을 따라 그때 예루살렘과 유다 땅을 떠났음을 알려 주고 있다. 기원후 제3,4세기 교회 역사가 유세비어스(Eusebius of Caesarea)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던 전체 교회는 전쟁 전에 경건한 자들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계시적 명령을 받고 그 도시를 나와 요단강을 건너 ‘펠라’라는 도시에 거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대의 에피파니어스(Epiphanius of Salamis)는 ‘예루살렘’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포위에 대해 그리스도로부터 예고를 받고 ‘펠라’로 이주하였다”고 기록했다.
한편 네로(Nero) 황제(A.D 37.12.15-68.6.9)는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하도록 베스파샨 장군을 임명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위험 지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베스파샨은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의 강력한 보조를 받으면서,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였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여 갈릴리 지방의 도시들을 공격하였으며,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마침내 도시들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을 실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타리캐’와 ‘가말라’ 두 도시가 당한 참상은 그 지방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잘 보여준다.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타리캐’에서는 유대인 6천 명 이상이 전투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자비한 취급을 받았다. 늙고 쓸모없는 사람들 1천 2백 명은 살해되었다. 3만여 명은 노예로 팔려갔으며, 튼튼한 청년 6천 명은 네로 황제를 위하여 고린도 운하를 파는 데 노역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가말라’에서 유대인들의 사태가 절망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성벽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들도 몸을 던져 죽었다.
▶다음호에 계속
미션21 phj2930@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