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1 미션21 phj2930@nate.com |
| 2024년 05월 21일(화) 1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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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인격적인 것으로 우리가 성령을 단순히 하나의 감화력이나 일종의 능력으로만 간주해 버리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또한 위험하다. 그분은 완전한 지식(요14:26)과 감정(엡4:30)과 의지(고전12:11)를 갖추신 한 인격체로서 그분의 감정은 성도들의 죄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그분의 감정 영역인 근심이란 어떤 것인가? 주석가 R. A. Cole은 바울이 엡4:30을 기록할 때, 구약 사63:10의 “근심케 하다”(히: atsab)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다고 하였으며, 원어 연구가 J. Owens는 이 “근심하다”(히: atsab)를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슬프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 섭섭하게 하다”(grieved) 등으로 번역하였다. J. R. Stott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근심하다”(헬: Lypeo)는 오직 인격체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 고통, 번민”을 말한다고 하였고, Dick Irverson은 여기서의 근심(grief)이란 단순한 슬픔 정도를 넘어선 훨씬 정도가 심한 깊은 슬픔 또는 마음속의 강렬한 비통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다(롬8:9). 우리는 그분에게 기쁨을 드릴 수도 있고, 근심을 끼쳐드릴 수도 있다. 그분의 우리 안에서의 상태는 두 가지, 즉 기쁨 아니면 근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시는지, 근심하시는지를 늘 확인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분노하게 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오! “분노”가 아니라 “근심”이라고 한 것은 곧 그분의 사랑이다. 미워함이 있으면 반드시 분노가 있다. 성령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한 번도 미워함으로 분노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가 아무리 죄악 속에 빠질지라도 성령은 분노하지 않고 근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만일 성령이 구약 시대처럼 우리 안에서 떠날 수도 있다면(시51:10) 그분은 근심할 필요가 없고 분노하고 떠나 버리시면 그만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에 근심하시는 것이다. Rene Pache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그분이 한 인격을 갖고 계신 분만이 아니라 무한한 감수성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롬15:30)라고 하였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율법을 어겼다는 것보다는 우리가 “사랑”에 반대하여 행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근심하다”의 용어는 바로 그 점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마26:37-38의 “고민”과 같은 단어이다. 이 고민이 어떤 고민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 하셨던 바로 그 겟세마네의 “고통”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된 것 같이 큰 고통으로 성령은 슬퍼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계속 슬퍼하고 고통하며 심히 괴로워하실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아아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분을 근심시켜 드렸는가.
얼마나 그는 아픔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셨는가. Oswald J. Smith는 “우리가 그를 상하게 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어떻게 그가 느끼셨는지 꼭 실감하였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깊이 거듭거듭 근심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를 한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가 우리 마음 안에서 다스리시고 우리의 생활을 관리하시고 우리가 탈출하려고 꾀했던 그 숱한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분은 고민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육체의 나타남 즉 모든 육신적인 성품의 발로는 그에게 근심을 끼쳐드린다.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제멋대로 하기를 고집했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했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들을 남용했을 때마다.
▶다음호에 계속
그분의 감정 영역인 근심이란 어떤 것인가? 주석가 R. A. Cole은 바울이 엡4:30을 기록할 때, 구약 사63:10의 “근심케 하다”(히: atsab)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다고 하였으며, 원어 연구가 J. Owens는 이 “근심하다”(히: atsab)를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슬프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 섭섭하게 하다”(grieved) 등으로 번역하였다. J. R. Stott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근심하다”(헬: Lypeo)는 오직 인격체만이 느낄 수 있는 “슬픔, 고통, 번민”을 말한다고 하였고, Dick Irverson은 여기서의 근심(grief)이란 단순한 슬픔 정도를 넘어선 훨씬 정도가 심한 깊은 슬픔 또는 마음속의 강렬한 비통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다(롬8:9). 우리는 그분에게 기쁨을 드릴 수도 있고, 근심을 끼쳐드릴 수도 있다. 그분의 우리 안에서의 상태는 두 가지, 즉 기쁨 아니면 근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시는지, 근심하시는지를 늘 확인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분노하게 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오! “분노”가 아니라 “근심”이라고 한 것은 곧 그분의 사랑이다. 미워함이 있으면 반드시 분노가 있다. 성령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한 번도 미워함으로 분노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자! 우리가 아무리 죄악 속에 빠질지라도 성령은 분노하지 않고 근심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만일 성령이 구약 시대처럼 우리 안에서 떠날 수도 있다면(시51:10) 그분은 근심할 필요가 없고 분노하고 떠나 버리시면 그만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에 근심하시는 것이다. Rene Pache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그분이 한 인격을 갖고 계신 분만이 아니라 무한한 감수성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롬15:30)라고 하였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율법을 어겼다는 것보다는 우리가 “사랑”에 반대하여 행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근심하다”의 용어는 바로 그 점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마26:37-38의 “고민”과 같은 단어이다. 이 고민이 어떤 고민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 하셨던 바로 그 겟세마네의 “고통”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된 것 같이 큰 고통으로 성령은 슬퍼하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계속 슬퍼하고 고통하며 심히 괴로워하실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아아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분을 근심시켜 드렸는가.
얼마나 그는 아픔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셨는가. Oswald J. Smith는 “우리가 그를 상하게 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어떻게 그가 느끼셨는지 꼭 실감하였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깊이 거듭거듭 근심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를 한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가 우리 마음 안에서 다스리시고 우리의 생활을 관리하시고 우리가 탈출하려고 꾀했던 그 숱한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분은 고민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육체의 나타남 즉 모든 육신적인 성품의 발로는 그에게 근심을 끼쳐드린다.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제멋대로 하기를 고집했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했을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들을 남용했을 때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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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2(목) 14: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