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촌놈이 도시에 와보니 모든 것이 신기했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았다. 기가 죽고 움츠러들었다. 상상도 못한 또다른 세상이었다. 누나 집에서 전학 갈 학교까지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부산에 온 다음날 누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부산 대평초등학교이다.
학교 가기 전에 누나가 검정고무신 대신 검정운동화를 사주었다. 같은 검정색인데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니. 나는 너무 기뻤다. 타이어 같은 투박한 말표 태화고무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도회물을 맛본 것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다른 얘들은 왕자표 좋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담임선생님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서 있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내 성적표를 자세히 보시더니 “공부를 참 잘했군!” 하고 칭찬해 주셨다. 내 성적은 1학년 때부터 모두 ‘수’였다.
‘올 수’였다. 그때는 성적을 수, 우, 미, 양, 가로 매기던 때였다. 담임선생님께서 반 학생들에게 한껏 띄워서 소개해주셨다.
“이 박주정 군은 보통 학생이 아니다. 전라도 고흥에서 온 수재 학생이다.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우’ 하나가 없는 천재 학생이다.”
‘와’하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처음과는 달리 휘둥그레한 눈으로 일제히 쳐다봤다. 어린 나이에도 몹시 쑥스러웠다. 한 달 후에 월말고사 시험을 보았다.
16등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시골에서는 항상 전교 1등이었다. 좀 그런 표현이지만 넘볼 학생이 없는 단독 선두였다. 부산에 와서 치른 첫 시험은 우리 반 학생 50명 중 16등이었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칭찬이 떠올라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 누나에게 성적을 고백하면서 다음번 시험에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집에 가서 누나에게 머리를 면도로 빡빡 밀어달라고 했다. 눈앞으로 머리카락이 떨어지는데 누나는 면도로 밀어주면서 웃었다. 지금도 머리칼을 밀어준 누나를 떠올리면 참 재밌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동생이 밀어주라고 하니 두말없이 밀어준 것이다. 머리칼이 없어진 민둥머리이니 누가 보면 꼭 반항이라도 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머리칼이 말끔히 정리되듯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그런데 공부할 책이 없었다. 반 친구들은 모두 전과와 수련장이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이런 책들을 살 수가 없었다. 아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나한테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매형은 작은 회사에 다녔기에 겨우 연명이나 하는 형편이었다.
생활하는 방은 세 평 남짓이었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모양의 다락방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잤다. 신혼부부인 누나의 단칸방에서 눈치도 없이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불을 켜고 있었다. 매형이나 누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핏줄이니 가능했을까?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딱 한 마디 ‘미안함’뿐이다.
반 친구들한테 전과나 수련장을 빌려보면서 두 달 후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그렇지만 학년마다 학급이 13반까지 있는 큰 학교였다. 한 반에 50여 명씩이었으니 5학년 전체 학생은 650여 명이었다.
학년 전체에서 2등을 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누나도 매형도 기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날 처음으로 누나한테 통닭 한 마리를 얻어먹었다.
6학년 말쯤 작은형이 군에서 제대하고 부산으로 왔다. 오갈 데가 없으니 작은형도 함께 살게 되었다. 작은형은 누나 바로 위의 오빠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식구가 한 명 더 늘어 4명이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절레절레한 힘든 현실이었다.
대평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나는 성적 우수 학생으로 표창을 받았다. 시골 촌놈이 나름 삭발까지 한 결심으로 이룬 결과였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위안거리가 되었구나 싶어서 기뻤다. 작은형이 우수 학생 표창으로 받은 장학금을 가지고 삼겹살을 사 주셨다. 통닭에 이어 처음으로 먹어본 삼겹살이었다. 쩍쩍 씹히는 단백질과 번드르르한 기름기가 입안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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