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의 정화-2 (사 12:1-28) 미션21 phj2930@nate.com |
| 2023년 08월 24일(목) 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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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서
예레미야 애가(哀歌)에 나오는 애가(哀歌)와 같은 뜻이다. “슬픈 노래”이다. 시온의 멸망을 내다보고 이사야는 애가를 불렀다. 그 내용이 1:21-28절까지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사제들의 타락상을 보았다. 예루살렘은 피로 물든 도시가 되었다고 조사(弔詞)를 읊는다. 한때 찬란했던 왕국 시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도성이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정의의 요새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옛 시온(하나님이 현존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브리트올람)은 파괴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부정과 불법 온갖 사악한 것이 지배하는 피의 도성이 되었다. 관리는 부정에 혈안이 되었고 공평은 사라졌다. 재판관은 뇌물로 재판했으며 사제들은 거짓말로 예언하였다. 구약의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다루는 것은 속이는 저울추요, 불의의 재판이다. 이것은 도덕 기반이 무너져 공동체를 해치는 결과가 되었다.
예루살렘을 의인화(擬人化)하면 여성형이 된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졌을 때 예루살렘은 정숙한 처녀, 의로운 여인으로 찬양받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지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거짓 종교 행위와 불법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방 종교에 넘어간 창녀와 같이 되었다. 순결성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계약과 충절, 사랑을 버렸다. 외형적인 모습만 볼 때는 예전 상태와 같다. 오히려 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미카 1:9). 예언자는 나타난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죄의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성, 첫사랑인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예언자는 그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언자가 보는 세계관은 다르다. 도시의 번영이나 외관상 변화나 발전에 두지 않는다. 예언자 이사야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주 저편까지 미친다. 이사야는 북방의 거인 앗수르의 침략을 이미 읽고 있었다. 백성을 호도하는 일시적인 안정책을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것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도덕적 기강의 확립이요,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를 책임진 지도층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루살렘이 정숙한 여자, 지혜로운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공평(미스파트)과 의로움(쩨데크)이 있으면 된다. 그러면 충실하고 신실한 도성이 될 것이다. 창녀의 오명을 벗고 현숙한 아내가 될 수 있다. 성도 예루살렘이 타락하여 창녀처럼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혼합종교의 악습을 벗어버리고 거듭나야 한다. 예루살렘의 정화는 야훼께 돌아오는 데 있다.
2. 심판을 통한 정화
도성 자체보다는 타락한 지배자들을 정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군중이 있고, 영광이 있고, 명예가 백성을 책임진 고위 관리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잿물처럼 녹여”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25절에 대한 다른 사본은 “풀무에 녹이리라.”로 나온다. 히브리어가 비슷하다. “잿물”은 “카비르”이고 “풀무”는 “바쿠르”이다. 예루살렘을 정의의 도성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신탁은 단순히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과 불경한 자, 의로운 사람과 배신자들을 분리시켜 나눈다. 이것이 심판을 통한 정화이다. 불순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잿물로 녹이고 풀무불로 제련한다. 찌꺼기나 납연 등을 제거해야 순수한 은이 나올 수 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 길은 불신앙의 무리를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에 의해서만 이 일은 가능하다. 이것은 정치적 힘의 발휘로 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의인(義人),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때 잃었던 신앙은 회복되며 동시에 공동체는 갱신에 이르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예레미야 애가(哀歌)에 나오는 애가(哀歌)와 같은 뜻이다. “슬픈 노래”이다. 시온의 멸망을 내다보고 이사야는 애가를 불렀다. 그 내용이 1:21-28절까지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사제들의 타락상을 보았다. 예루살렘은 피로 물든 도시가 되었다고 조사(弔詞)를 읊는다. 한때 찬란했던 왕국 시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도성이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정의의 요새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옛 시온(하나님이 현존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브리트올람)은 파괴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부정과 불법 온갖 사악한 것이 지배하는 피의 도성이 되었다. 관리는 부정에 혈안이 되었고 공평은 사라졌다. 재판관은 뇌물로 재판했으며 사제들은 거짓말로 예언하였다. 구약의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다루는 것은 속이는 저울추요, 불의의 재판이다. 이것은 도덕 기반이 무너져 공동체를 해치는 결과가 되었다.
예루살렘을 의인화(擬人化)하면 여성형이 된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졌을 때 예루살렘은 정숙한 처녀, 의로운 여인으로 찬양받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지금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거짓 종교 행위와 불법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방 종교에 넘어간 창녀와 같이 되었다. 순결성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계약과 충절, 사랑을 버렸다. 외형적인 모습만 볼 때는 예전 상태와 같다. 오히려 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상처는 고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미카 1:9). 예언자는 나타난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죄의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성, 첫사랑인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예언자는 그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언자가 보는 세계관은 다르다. 도시의 번영이나 외관상 변화나 발전에 두지 않는다. 예언자 이사야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주 저편까지 미친다. 이사야는 북방의 거인 앗수르의 침략을 이미 읽고 있었다. 백성을 호도하는 일시적인 안정책을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것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도덕적 기강의 확립이요,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를 책임진 지도층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루살렘이 정숙한 여자, 지혜로운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공평(미스파트)과 의로움(쩨데크)이 있으면 된다. 그러면 충실하고 신실한 도성이 될 것이다. 창녀의 오명을 벗고 현숙한 아내가 될 수 있다. 성도 예루살렘이 타락하여 창녀처럼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혼합종교의 악습을 벗어버리고 거듭나야 한다. 예루살렘의 정화는 야훼께 돌아오는 데 있다.
2. 심판을 통한 정화
도성 자체보다는 타락한 지배자들을 정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군중이 있고, 영광이 있고, 명예가 백성을 책임진 고위 관리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잿물처럼 녹여”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25절에 대한 다른 사본은 “풀무에 녹이리라.”로 나온다. 히브리어가 비슷하다. “잿물”은 “카비르”이고 “풀무”는 “바쿠르”이다. 예루살렘을 정의의 도성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신탁은 단순히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과 불경한 자, 의로운 사람과 배신자들을 분리시켜 나눈다. 이것이 심판을 통한 정화이다. 불순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잿물로 녹이고 풀무불로 제련한다. 찌꺼기나 납연 등을 제거해야 순수한 은이 나올 수 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 길은 불신앙의 무리를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에 의해서만 이 일은 가능하다. 이것은 정치적 힘의 발휘로 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의인(義人),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때 잃었던 신앙은 회복되며 동시에 공동체는 갱신에 이르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미션21 phj2930@nate.com

2026.10.22(목) 14: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