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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2(금) 12:12
로트는 왜 떠나야만 하는가?

스스로 택한 멸망의 길(창 13:9)

미션21 phj2930@nate.com
2021년 08월 31일(화) 14:17
정형수 목사
「네 앞에 모든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가거라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차지하겠다. 네가 오른쪽을 차지하면 내가 왼쪽으로 옮기겠느니라」(창 13:9 私譯).
이스라엘의 역사기원은 한 개인에게서 시작된다. 황당무계한 신화적 요소가 없으며 국가권력도 나오지 않는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소시민 아브라함을 택하면서 신앙이 잉태되고 히브리 민족이 탄생 된다. 그리고 야훼의 거룩한 이름이 가나안 땅에서 알려지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성품이 선량한 소시민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자랑할 것이 없다. 아브라함의 초기 신앙은 매우 불안전했다. 그는 야훼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인 우르가 멸망되기 전 그곳을 빠져나왔지만, 야훼에 대한 믿음이 불안전하여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북상하다가 자신의 본래 고향인 하란에 머물렀다. “하란”은 “머뭇거리다”란 뜻이고, 그의 아버지 “테라흐”는 “지체하다, 휴식하다”란 뜻이다(The Encyclopedia of Eastern orthodox Christianity, Ed. John Anthony McGuckin).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이 먼저 죽은 후 부친 테라흐(지체하다)가 죽었다. 어원적으로 “테라흐”는 “하란”에서 죽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브라함은 신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불완전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결단시키기 위한 야훼의 섭리다. 아버지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죽음”은 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로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창 11:28-32). 자식이 없는 그에게 혈육은 로트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할 때 로트까지 대동하라는 명령은 결코 없었다(창 12:1-3).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것들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다. 그는 야훼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여 친척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로트”란 “루트”에서 온 말로 “덮개, 베일”이란 의미로, 그의 신앙은 “장막”은 있는데 “제단”이 없는, 항상 덮개로 덮인 것처럼 베일에 덮여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아브라함의 “장막과 제단”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제단”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딤후3:5) 형식신앙에 불과했다는 반증(反證)이다. 곧 야훼와의 인격적인 깊은 교제가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은 신명을 들은 후 제2차 방랑길인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장장 625km 여정에 로트를 대동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방 종교를 가진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야훼의 음성을 듣는다(창12:7,8). 이것은 일종의 영적 전쟁에 대한 선전포고(宣戰布告)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살이 하면서도 가나안의 원주민과 마찰을 피하여 산간 지방을 방황하다가(창12:6-9) 마침내 애굽에까지 다녀왔다(창13:1-2). 수많은 여정 가운데서도 가축 떼는 점점 불어나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창13:2). 은, 금, 가축 떼의 번성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조카 로트는 그들의 목자들끼리 서로 다툼으로 함께 동거할 수 없게 되었다(창13:6-7). 목축업자들에게 목초지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척박한 땅에서 목초지 때문에 자주 분쟁이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결심했다. 양보하여 갈라서기로 한 것이다. 헤브론 경사지에서 아브라함은 로트에게 말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로 가고 네가 서하면 내가 동으로 이동하겠다.” 선택권을 롯에게 주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로트는 양보하는 미덕도 없이 자기 눈을 높이 쳐올려(나사) 사해 남단 소돔성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기에 나일강변의 옥토인 애굽과 같고 마치 야훼 동산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으로 야훼를 보지 못하고 오직 눈으로만 물질을 보았다. 그는 제 발로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다. 그는 단순히 가나안만 떠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약속, 축복)과 품을 떠난 것이고, 곧 야훼를 떠난 것이다. 그는 선택권이 그에게 우선적으로 있었는데도 약속의 땅을 버리고 죽을 곳으로 찾아갔다. 만일 그가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기로 약속하셨다. 로트가 아니다. 그는 떠나야만 한다. 함께 있다고 선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는 부모나 다름없는 아브라함을 뒤로 하고 소돔을 향해서 장막을 쳤다(창 13:12). 역시 그에게는 제단이 없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을 등진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심판을 의미했다.
로트는 소돔성에 유황의 불벼락이 떨어질 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창19:29) 구원을 얻는다. 동틀 무렵 천사들의 재촉에도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 두고 계속 지체했다. 킷텔(Kittel)의 구약성경 히브리어판을 보면 성서 문장에 붙는 기호표가 들어 있다. 이 기호는 모두 27개로 단어(동사)에 붙어 있는데, 이 기호는 글자 상하 및 옆에 붙어 있다. 이 기호에 의해서 운율(크네셋트에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나라 시조조로 읽는 상태), 휴식 등 기호에 따라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이 기호가 있어서 글자의 의미가 변하는 것은 아니나 읽을 때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27개 기호 중 살세렛트(Shalshelet)라는 기호가 있다. 이 살세렛트는 동사에만 붙는 데 글자 왼쪽에 한일자로 길게 서 있고 글자 위에는 쇠고리 모양의 표시로 된 기호가 붙어 있다. 이 기호를 히브리어로 살세렛트라고 하며, 영어로는 체인(chain)으로 “사슬 고리”라는 뜻이다. 이 살세렛트가 붙어 있는 동사는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숨어있다는 표시다. 즉 “주의”, “교훈”이 담겨진 내용이란 뜻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살세렛트가 붙어 있는 성경 구절을 읽는 자는(강론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깊이 연구하고 계발(啓發)해서 새로운 사실을 말로 교훈하라는 뜻이다. 재론하면 살세렛트가 붙어 있는 성경 구절은 그 나타난 내용보다 그 구절이 지닌 더 깊은 의미를 터득해서 교훈으로 삼고 설명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살세렛트 기호가 붙어 있는 성경구절은 모세오경에서 모두 네 군데 나온다. 그리고 모두 동사(히브리어는 동사에 생명이 있다. 신앙은 행동이지 사색이 아니기 때문이다)에 붙어 있어 생동감을 주는 가장 귀한 구절인데 네 군데 나오는 구절들 중에 로트에 해당되는 “지체하매”(바이트마헴마하, 창19:15-16)가 그 첫 번째 동사가 된다. 이 동사는 히브리어 동사 중 “히트파레렐”이라는 동사로 재귀동사라고 한다. 즉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동작을 말한다. 원어는 “바이트마헴마하”로 “자신이 질질 끌다”, “지연시키다”, “꾸물거리다”, “지체하다”의 뜻으로 로트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이 눈앞에 임박했다는 천사의 경고를 듣고도 자기 자신이 꾸물댔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소돔성에서의 풍요한 물질 생활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향락과 지나친 이기주의와 사치가 영적 통찰력과 지적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큰 재앙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풍부한 물질생활을 잊을 수가 없어서 지체하였다.
도덕적 양심과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신앙이 물질적 풍요와 관능적 쾌락 앞에서 힘을 잃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에스겔은 소돔성의 죄를 이렇게 규정했다. 교만, 식물의 풍성, 안일, 음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멸시한 죄라고(겔 16:49). 이와 같이 무서운 죄의 소굴에 대한 심판 앞에서 롯은 지체했다. 그 동안 쌓아둔 재물과 향락이 그 도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들어 그를 지체하게 한 것이다. 소돔성은 사해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그곳을 가보면 지옥의 문턱에 온 느낌이 든다. 사해 서쪽에 위치한 남북 길이 10km 폭 25m ~ 5km, 높이 10m 정도의 세벨우스톰이라고 불리는 곳은 암염산(岩?山)이 줄을 이어 서 있다. 이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풍우작용(風雨作用)을 받아 아라비아 부인(婦人) 모양의 소금 기둥으로 서 있다(모래, 소금, 유황으로 된 기둥). 많은 기둥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부인 모양의 기둥으로 로트의 처로 불리어지고 있다(눅 17:32). 이 로트의 처는 물욕에 눈이 어두운 인간으로 후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무서운 재앙이 임박했는데도 꾸물거리며 지체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멸망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도덕적 양심이나 주님의 경고의 말씀보다 물질의 풍요를 따르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경고이다. 여기서 지체하면 인생은 이것으로 끝장이 난다.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결단의 최종성은 인간이 내려야 한다. 결단의 순간에 지체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에는 반드시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 마25장에 등장하는 세 가지 비유(10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는 모두 “기회의 중한 책임”을 교훈하는 비유들이다. 천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3: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한다(고후6:1-2). 회개할 기회, 구원의 기회, 섬기고 사랑할 기회, 전도할 기회, 감사할 기회, 성령의 열매를 맺을 기회 등. 더 크고 위대한 기회는 작은 기회에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과 축복이다. 로트는 모든 재산과 아내를 잃고 산속(소알성)으로 들어갔으며 토굴 속에 살다가 두 딸들과의 정사(情事)로 불경스럽고 더러운 조상인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창 19:15-38). 로트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차지한 가나안 땅 주변을 맴도는 유목민으로 거친 사막 민족이 되었다. 자기 발로 눈의 유혹을 따라간 결과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cross)는 항상 우리에게 구원이냐, 심판이냐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요3:16-18). 십자가(교차로, cross) 앞에서 서서 우리는 오늘도 선택을 요청받고 있다.


정형수 목사
아시아교회 담임
Mission Bible college & Seminary 대학원장

미션21 phj293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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