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동학습장 저 건너에 우뚝한 산이 있다. 병풍산, 불태산, 삼인산이 형제처럼 우애 있게 나란하다. 그 밑자락으로 용전 들판이 펼쳐지고 영산강이 본격적으로 굽이치기 시작한다. 이 강둑 언저리에 공동학습장이 있으니 풍광이 좋을 수밖에. 무등산만큼은 못 하지만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제법 있는 편이다.
어느 깊은 가을날, 그해에는 조금 이른 김장을 했다. 워낙 많은 양의 김장을 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고 서두른다. 집단생활에서 때를 놓치면 생각보다 훨씬 심란해진다.
학생, 학부모, 우리 가족 등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배추를 버무리고 있는데 등산복을 입은 허름한 영감님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김치가 참 맛있게 보이네요. 어디 한 쪽 먹을 수 없겠어요?”
학부모들의 빠른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그러십시다.”
한 학부모가 싹싹하게 웃으며 김장김치 한 가닥을 찢어 영감님 입에 넣었다.
맛있게 잡수고 나서 물었다.
“이곳이 뭣 하는 곳입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들이 한두 마디씩 했다.
“하늘 아래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이 어디 있겠어요.”
“자기 몇 푼 안 되는 봉급으로 제자 수백 명을 이곳에 델고 와서 공부 시키고 있다요.”
김장판 옆에는 학생들이 일손을 돕고 있었다.
“그래요, 듣고 보니 참 훌륭한 선생이네요.”
영감님이 김치를 맛있게 먹으니까 엄마들이 비닐봉지에 몇 폭 싸드렸다. 학생한테 들어다 주라고 시켰다.
그런데 공동학습장 초입에서 큼직한 검정색 승용차에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영감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잽싸게 문을 열었다. 학생이 가져간 김치는 뒷트렁크에 실었다.
그 영감님이 왔다 간 후에는 매달 익명으로 쌀이 왔다.
도대체 누가 쌀을 이렇게 보내줄까?
그분이 누굴까?
너무나 궁금하던 차에 건너건너 소문 끝에 알게 되었다.
김원본 교육감.
당시 광주광역시교육청 교육감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동학습장 소문을 듣고는 소리 없이 그리고 철저히 내 뒷조사를 했다고 한다.
교육청에서 나를 불렀다. 교육감이 급하게 찾는다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2층 교육감실로 갔다. 비서실에서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육감이 직접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당신이 박주정 선생이십니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보게 되어 너무 좋네요.”
손을 잡고 넓은 집무실로 데려가면서 계속 말씀하셨다.
우리 광주시에 당신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 계신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나는 박 선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어요. 허허. 박 선생님의 뒷조사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선행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박 선생님이 우리 교육청의 생활지도 정책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주세요. 등등.
그렇잖아도 학생들 생활지도는 교사로서 하고 싶은 업무였고 나름 실천해온 분야가 아닌가. 나는 그때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장학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육감께 그 사실을 말씀을 드렸다.
“교육감님, 저도 생활지도 장학사가 되고 싶어서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잘됐네요, 경험이 많으니 잘 되겠네요. 꼭 합격 기대합니다.”
큰 몸집에 두 손을 내밀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그 후 나는 세 분의 교육감을 모시면서 18년간 교육청 학생생활지도담당 업무를 맡았고 장학관, 국장이 되었다.
떠도는 소문이 김장김치에 머물더니, 쌀 포대로 오가면서 과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미션21 phj2930@nate.com